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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과거로의 산책

과거로의 산책

도시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과거를 발견할수도 있다. 원래 주거지의 배치에 따라 그 뒤의 건축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낡은 건물을 허문 뒤 남은 공간의 모양이 새로운 건축물의 구조를 결정한다. 굴곡이 진 도로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성벽이 있던 자리를 표시할수도 있다. 가옥의 건축 양식과 도로의 구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이중에는 변형된 형태로나마 아직까지 남아있는것도 있다. 옛날 집이 여러채 나뉜다던지, 작은 집들이 한채가 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건축상의 세부 사항이 각 구조의 역사를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지명을 통해 사라진 구조물이나 달라진 쓰임새를 알수도 있다. 1236년 에스파냐의 ㄱ크리스트교 지배자는 코르도바를 탈환하고, 모스크를 교회로 개조했다. 16세기에는 대성당을 세우려고 중심부를 완전히 파괴했다. 화려한 돔이 이슬람교의 미흐라브에서 보이는 절제된 아름다움과 대비된다고 한다. 서고트족은 로마로부터 빼앗은 코르도바를 아랍인에게 빼앗겼다. 서고트족의 유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교회는 786년 모스크바를 세우기 위한 기초가 되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담을 뚫고, 모스크의 가장 오래된 문인 성 스티븐스 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발굴을 할까?

14세기이래 수집가들은 고대의 위대한 유물을 찾아 헤맸다. 발굴자들은 고서를 통해서만 알수 있었던 과거에 대해 더 많은것을 알고자 노력했다. 19세기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선사시대의 문화와 그 주민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밝혀냈다. 과거에 대한 그림은 그려졌지만 연대 측정이 문제였다. 발굴자들은 연대를 결정하기 위해 자료를 모았다. 과학적인 연대 결정법으로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난 현대의 발굴자들은 삶의 모든 측면을 조사할수 있게 되었다. 고대의 유물에 대한 수요는 도굴꾼을 탄생시켰고, 도굴은 아직도 계속된다. 훌륭한 프레스코화와 부조가 있는 에트루리아의 무덤은 18세기 유럽 주유 여행에 나선 영국 상류계급에게는 흥미로운 관심사 였다고 한다. 복잡하게 조각한 청동기시대의 거울은 에트루리아의 유물중에서도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19세기 말, 학자들은 에트루리아의 거울 설명과 같은 여러 자료를 가지고 에트루리아의 역사를 재구성 하였다. 19세기 주압ㄴ의 유적 발굴 방식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는데, 발견물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중부의 오르비에토에 있는 에트루리아 무덤과 같은 특출한 유적에서 유물을 찾는 일만 계속 강조되었다. 에트루리아의 유물은 새롭게 통일된 이탈리아 민족에게 조상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20세기 초, 고고학자들은 유럽의 문화는 서아시아와 그리스의 문명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프레스코화에 그리스의 전설을 그린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그리스 에서 건너왔다고 생각했다. 그 뒤의 발굴 작업으로 에트루리아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했고 교역을 통해 그리스 문물을 받아들였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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